▲ 엔팩의 수소저장합금. 용도에 따라 크기와 모양을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다.

[월간수소경제 송해영 기자] 미태양광, 풍력 등의 재생에너지를 이용해 화석연료를 대체하려는 ‘에너지 전환’은 이제 전 세계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 역시 ‘재생에너지 3020’을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계획대로 이행된다면 2030년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63.8GW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문제는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이다. 풍력발전은 풍속이 높을수록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한다. 하지만 풍력발전 사업자는 ‘바람이 불어도 걱정, 안 불어도 걱정’이다. 태풍과 같이 짧은 시간 동안 강한 바람이 불어 발전량이 수요량을 크게 웃돌면 전력계통의 주파수 및 전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바람이 불지 않으면 충분한 전기를 공급할 수 없다.

배터리 ESS로 미활용 전력(curtailment)을 저장할 수도 있지만, 장시간 저장 시 방전된다는 단점이 있다. 이러한 문제로 재생에너지 발전비율이 높아질수록 ‘수소’가 주목받고 있다. 풍력발전의 미활용 전력으로 물을 분해해 수소를 생산하고, 그 수소를 저장했다가 연료전지에 투입해 필요한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다. 즉, 효율적인 ‘수소 저장’ 방안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지금은 수소가스를 고압으로 압축해 저장하고 있다. 수소가스 압축 기술은 이미 개발이 완료되어 차량, 충전소 등에 폭넓게 쓰이고 있지만, 350~700bar에 이르는 고압가스의 특성 상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또한 압축 과정에 콤프레서가 필요한데 그 가격이 만만치 않다. 이에 따라 액화수소, 수소저장합금 등 여타 수소 저장 방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정부는 지난 1월 ‘수소경제 활성화 로드맵’에서 ‘수소저장합금 등 고체 물질의 내부 또는 표면에 수소를 저장하는 고체저장은 수소 저장 방식 중 가장 안전하다’고 설명하며 2030년까지 상용급 저장 기술을 실증 및 상용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 김병관 엔팩 대표.

현재 국내에서 수소저장합금과 관련해 연구 개발 중인 기업은 엔팩(ENFAC)이 유일하다. 엔팩의 김병관 대표는 지난 2009년 한국에너지재료를 설립해 본격적인 수소저장합금 연구 개발 및 실용화에 나섰다. 엔팩은 한국에너지재료의 자회사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수소저장합금 대량 생산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수소저장합금이란

금속은 틈 하나 없는 하나의 물질처럼 보이지만, 확대해서 보면 금속 원자가 격자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에는 빈 공간이 존재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원소 중 가장 가벼운 수소는 크기 또한 작아 금속 원자들 사이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수소의 이와 같은 성질을 이용한 것이 수소저장합금(Metal Hydride)이다. 수소저장합금은 여러 종류의 수소친화력을 갖는 금속 원소와 전이금속 등을 조합한 것으로, 결정격자 사이에 수소를 저장하고 가열이나 감압을 통해 수소를 방출할 수 있다. 금속 원소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수소저장합금을 만들 수 있으며, 수소저장합금의 기술 수준은 부피 대비 에너지 밀도나 수소 흡·방출 속도 등으로 결정된다.

엔팩은 지난 2013년 교육과학기술부의 ‘21세기 프론티어 연구개발사업’인 ‘고효율 수소에너지  제조·저장·이용기술 개발 사업단’의 지원을 받아 진공유도용해법(VIM)을 이용한 고성능 티타늄(Ti)계 수소저장합금 대량 제조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이에 따라 일일 최대 1톤의 수소저장합금을 제조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엔팩은 자사에 수소저장합금 대량 생산이 가능한 진공유도용해 설비를 보유하고 있다.

▲ 엔팩이 보유한 진공유도용해설비. 일일 최대 1톤의 수소저장합금을 제조할 수 있다.(사진=엔팩)

엔팩에서 개발한 수소저장합금은 최대 저장용량이 2.0wt% 이상으로, 기존의 란탄-니켈합금(LaNi5)에 비해 이용효율이 약 33% 뛰어나 1m³의 수소저장합금에 약 130kg의 순수한 수소를 저장할 수 있다.

안전 걱정 없는 수소 저장 및 운송

수소저장합금을 이용할 경우 수소를 상온 상압에서 저장 및 운송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 전력으로 물을 분해하면, 생산되는 수소의 압력은 20~30bar 수준이다. 엔팩은 수소저장합금의 저장 압력을 10bar로 설정했으므로, 수전해 수소를 저장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압력을 낮추는 과정이 필요하다. 압력을 높이려면 고가의 콤프레서가 필요하지만, 압력을 낮추는 것은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레귤레이터라는 간단한 구조의 장치만 있으면 된다. 이후 수소가 결합된 수소저장합금은 직육면체, 원통형 등 원하는 형태로 변형시킬 수 있다.

▲ 티타늄계 수소저장합금.(사진=엔팩)

이후에는 트럭 등을 이용해 수소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운송하면 된다. 대형 튜브 트레일러와 달리 도심 진입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연료전지가 필요로 하는 수소 압력은 10bar보다 더 낮기 때문에 수소저장합금에서 방출된 수소를 투입하는 과정에서도 콤프레서는 불필요하다.

엔팩에서 개발한 수소저장합금은 부피 1m³당 1MWh의 전력을 저장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3MWh 이상 저장 가능하지만, 연료전지의 발전 효율을 고려해 1MWh로 발표했다는 것이 김 대표의 설명이다.

다양한 분야에 적용 가능한 ‘수소저장합금’

아직 많은 이들이 수소저장합금을 ‘실용화하기에는 이른 미래 기술’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수소저장합금 실증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일본 홋카이도의 무로란 시에서는 풍력발전소 전력과 1Nm³/h 규모 수전해 장치로 수소를 생산한 다음, 수소저장합금에 저장한다. 이후 2톤 트럭에 수소저장합금을 실은 다음 10km 가량을 주행해 다양한 시설에 수소를 공급하고 있다. 수소저장합금이 수소를 흡·방출하는 데 필요한 열은 민간 시설 내 연료전지의 미활용 저온 배열을 이용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존 배송망을 이용해 수소저장합금을 운송하는 실증사업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다만 수소저장합금의 유일한 단점인 ‘무게’가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는 분야에서는 수소저장합금을 이용한 수소 저장을 적극적으로 추진 중이다.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잠수함이다. 엔팩은 차기 연료전지 잠수함 ‘장보고-Ⅲ’ 프로젝트에 고체수소 저장시스템을 공급한다. 대우조선해양과 440억 원 규모의 구매 계약도 마쳤다. 잠수함은 수소저장합금을 이용하기에 최적의 분야다. 차량의 무게가 연비로 직결되는 자동차와 달리 잠수함은 잠항을 위해 일정 수준의 무게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잠수함은 한 번 출항하면 연료 공급이 힘들기 때문에 ‘얼마나 오래 잠항할 수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장보고-Ⅲ의 잠항기간은 한 달이다. 이는 태평양 왕복이 가능한 수준이다. 또한 수소가 금속 원자 사이에 결합되어 있다는 특성 상, 어뢰의 공격에도 폭발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안전성이 높다.

장보고-Ⅱ에는 독일 기업의 고체수소 저장시스템 및 연료전지가 탑재되었으나, 장보고-Ⅲ에는 고체수소 저장시스템(엔팩)과 연료전지(범한산업) 모두 국내 기업의 제품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 수소저장합금을 활용한 수소전기자전거.(사진=엔팩)

강원도와는 어선 및 자전거에 대한 수소에너지 적용 방안에 대해 논의 중이다. 최근 해양수산부와 환경부에서는 어선의 노후 엔진 교체를 위해 다양한 지원책을 펼치고 있다. 어선의 노후 엔진은 소음이 크고 오염물질을 다량 배출하는 등 많은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집어등은 많은 양의 전력을 소모하므로 전력공급량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배터리를 가득 채워 넣으면 어획물을 저장하는 어창의 크기가 작아질 수밖에 없다. 어창이 가득 차면 어민들은 잡을 고기가 남아 있더라도 뱃머리를 돌려야 한다. 배터리에 비해 에너지 밀도가 높은 수소저장합금을 사용하면 어창의 크기를 키울 수 있다.

수소저장합금을 이용한 자전거는 이미 제작이 완료되었다. 엔팩 사무실에는 실제 자전거에 탑재되는 수소저장합금 용기가 비치되어 있었다. 아이 팔뚝만한 용기 하나면 100km 가량 주행이 가능하다. 수소가 10bar 상태로 저장되어 있어 밸브를 열자 수소 가스가 소리를 내며 방출되었다. 10bar는 자전거용 공기주입기보다 조금 높은 수준의 압력이다. 따라서 고압가스 안전관리자 자격을 갖추지 않아도 얼마든지 다룰 수 있다.

김 대표는 수소에너지의 수용성을 높이기 위한 수소전기자전거 대여 사업을 제안했다. 경포대 등 관광지에서 수소전기자전거를 대여하는 것이다. 캔 용기에 담긴 수소저장합금을 자판기로 판매하면 적은 예산으로도 수소충전 인프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캔 용기에 담긴 수소저장합금은 어린아이라도 손쉽게 자전거에 체결할 수 있으므로 수소에너지의 안전성을 홍보하기에 이만한 아이템도 없다는 설명이다.

▲ 수소저장합금이 담긴 용기. 밸브를 열자 10bar로 저장되어 있던 수소가스가 방출되었다.

김 대표는 “지금은 지자체들이 이미지 제고나 공익적인 효과를 위해 수소충전소를 건설하고 있지만, 수소충전소는 적자를 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떨치지 못한다면 수소충전소 보급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라며 “이 같은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수소충전소도 얼마든지 흑자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기업들의 자발적인 시장 진입을 유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배터리 ESS의 자리 노리는 ‘수소저장합금’

수소저장합금이 결점 하나 없는 ‘만능’ 해결책인 것은 아니다. 질량 대비 에너지밀도는 높지만 무게가 여타 수소 저장 방법에 비해 무겁다. 가령 수소전기차의 수소 저장 방법을 고압수소탱크에서 수소저장합금으로 바꾸면 차량의 무게는 약 100kg 증가한다. 연비 향상을 위해 1kg에 매달리는 개발자들이 들으면 놀라 뒤집어질 만한 일이다.

반면 잠수함이나 지게차 등 무게중심을 맞출 필요가 있거나, 수소충전소에서의 수소 저장이나 비상용 전원과 같이 무게 이슈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야에서는 앞으로 수소저장합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 40피트 컨테이너(12m×2.3m×2.3m) 크기의 리튬 이온 배터리 ESS의 전력 저장량이 1MWh 수준이다. 반면 수소저장합금은 1m³당 최대 3.36MWh의 전력을 저장할 수 있다. 

김 대표는 “국내에는 수소저장합금 기술이 고가라는 인식이 퍼져 있는데, 지금 현재 기술 수준으로도 배터리에 비해 반 이상 저렴한 가격으로 제조 및 설치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또한 전기화학적 반응을 이용하는 배터리와 달리 물리적 반응을 이용해 수소를 흡·방출하는 수소저장합금은 ‘수명’이랄 것이 없다. 물을 몇 번 얼렸다 녹이든 제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김 대표는 “아직 우리나라에는 수소저장합금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수소저장합금에 대해 연구한 사람이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기 때문이다”라며 “기술 수준은 상용화 가능한 선에 도달한 만큼 앞으로는 다양한 실증사업 등을 통해 수소저장합금을 알리는 것에도 집중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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